껍데기, 또는 이미지의 이중성
-유벅의 세계
때로 우리의 눈을 미혹하는 이미지들은 알고 보면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환영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겉모습만을 보려 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물들의 껍데기이다. 세워진 것, 서 있는 것들을 안쪽에서 떠받치고 있거나, 이른바 ‘빅 픽처(Big Picture)’, 즉 큰 그림을 구성하는 작디작은 망점(point)들은 때로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살이를 비롯하여 사람의 눈에는 순간을 살다가 덧없이 사라지거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각종의 해충들도 이 세상에 나온 나름의 이치가 있을 것이다. 짧고 사소하다거나 해롭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모든 것의 중심을 자처한다. 문명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져간 작은 존재들의 영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2018 독립문 mixed media on cardboard 65x45
불빛을 보고 날아든 벌레들이 찐득한 유인액에 들러붙어 성상의 그림자를 빚어낸다. 덧없이 스러져가는 날벌레들의 사멸이 구원을 약속하는 구세주의 이미지로 부활한다. 미물들의 사체가 만드는 구원의 아이콘에는 죽음에의 유혹이라는 폭력성이 감춰져 있다. 이미지에 담긴 의미는 작은 해충들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이 작품에서 이루는 구원자의 이미지는 작가가 종이에 끈끈이 액을 발라놓을 때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작가의 의지이다. 작가의 의지와 벌레의 본능이 만나는 곳에서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난다. 작은 주검들이 이루는 구원자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미지가 함유한 의미와는 이율 배반적이다. 유벅 작가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세계를 뒤덮고 있는 껍데기로서의 이미지의 이중성을 함축한다.
향광성(向光性) 벌레들은 불빛을 보고 창에 날아들다가 허공에 쳐진 망사창의 덫에 걸려 그대로 풍경(landscape)이 된다. 날벌레들은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본능에 따라 희생된다. 벌레들을 유혹한 빛은 그들의 주검으로 그들이 들어오려고 했던 빛의 문을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투영하는 풍경으로 바꾼다. 빛나는 빛은 생명체들이었던 벌레들에게는 죽음의 덫이다. 이미지라는 말의 어원인 ‘이마고(Imago)’는 고대에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서 장례식에서 영정처럼 쓰던 것이었다. 그것은 죽은 자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죽은 자의 형상이었다. 이처럼 이미지는 대리물이자 매개체였다. 유벅의 작업에서 벌레들의 사체는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이미지 자체가 됨으로써 죽음이 곧 사멸의 기호가 된다. 빛은 생명을 약속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벌레들에게 빛은 죽음의 덫이다. 이 작은 존재들은 빛을 보고 달려들었다가 이미지의 덫에 걸려들었다. 이들에게 빛은 삶의 길이자 곧 죽음의 길이다. 삶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리하여 빛은 이미지의 덫이 된다. 이들이 만든 이미지가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의 모습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또한 작가에게는 이미지의 모순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장치로 쓰이고 있다.
이미지는 곧 죽음이다. 그럼으로써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은 원본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성의 특징으로 지적한 이미지가 곧 원본이 되는 지점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자체적인 위상을 가진다. 그것은 유벅의 작업에서 죽은 벌레들이 다른 추상적인 죽음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죽음을 지시하는 기호이자 이미지라는 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동시에 또 다른 죽음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각형 창틀 안에서의 풍경의 죽음을 지시하기도 한다. 자신과 동시적인 죽음이 풍경으로서의 ‘빅 픽처‘ 안에서 발생한다. 풍경이 죽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눈에 맞게 재단된 경치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잘려 나온 그것은 죽어서 인간의 미의식 속에서만 산다. 작가 유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러한 잠재적인 폭력성, 또는 허위의식으로서의 미의식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죽어가는 나비들을 작품에 이용하여 생명윤리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작가 유벅 역시 똑같은 딜레마에 봉착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이러한 이율배반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인간이 아름다움이라는 핑계로 은폐하고 있는 폭력성과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사로 대표되는 미술사는 평면에 감쪽같은 시각적 껍데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눈속임의 역사이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어쨌든 물감의 덩어리일 뿐이다. 어떤 물감은 특별한 종의 곤충 껍질을 짓이겨 만들기도 한다. 애초부터 미의식의 진화를 다루는 미술사는 완벽에 가까운 시각적 껍데기에 도달하기 위한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2010 소년 120x90 c-print-1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스스로 먹는 쪽이 되거나 최소한 먹히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위협적인 껍데기로 무장한다. 사회적으로 문신(Tatoo)은 어느 정도 타부인 까닭에 자기 몸에 그것을 시술받는 사람들은 대개 평소에는 옷으로 가려지는 몸의 한정된 부위를 택한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내는 타투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적이다. 그러나 옷으로 감추어지는 부위에는 은밀하고도 반항적이거나 자기 과시적인 그림을 과감하게 새겨넣음으로써 자신을 또 다른 알터 에고(alter ego)로 위장한다. 그렇게 옷 속에 숨겨지는 몸통의 배후에 작가 유벅은 유인액으로 불러들인 작은 벌레들을 다닥다닥 붙여서 일종의 허위의 껍질을 만든다. 그것을 완성하는 그림들이 비록 해충들이지만 작은 생명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행위가 가진 이중의 폭력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종이는 연약한 물질이지만 그것은 작은 삼각형의 역학으로 이루어진 종합적인 구조를 통하여 바빌론처럼 번성하고도 타락한 도시 문명의 겉모습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얇게 썬 골판지 조각들이 무수하게 쌓여서 수직과 수평, 또는 아치의 구조를 이루며 세상의 뼈대를 구성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집합이 만드는 전체의 껍데기에만 시선을 던진다. 그 속의 제 자리에서 각각 전체를 떠받치는 작은 구조들은 죽은 듯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 유벅은 근래에 벌레 작업 계열의 연장선에서 이러한 약하면서도 강한 물질인 종이를 이용하여 지질학적인 층상구조나 거대한 문명의 껍데기를 떠받치는 역학적 구조의 속을 보여준다.
2009 59x84 해바라기 c-print
껍데기와 속은 어떻게 다른가. 속을 모를 때 겉모습으로서의 껍데기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것이 벌레의 사체나 유약한 종이들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뒤에도 껍데기가 이루는 이미지인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난 뒤의 풍경은 시각적 환영을 넘어서 다른 것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이 타자의 희생을 딛고 있고, 강성한 문명이 연약한 물질들의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될 때, 이미지의 의미는 시각적 장막 너머에, 시각적 껍데기의 안쪽에 있다. 작가 유벅은 이러한 이미지의 이중성을 캐내기 위하여 보는 이의 불편한 시선을 과감하게 돌파한다. 보기에 불편하다는 것, 그것은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의 힘이다.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2018 성당 mixed media on cardboard 35x48
유 벅
추계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 졸업
2000 올해 20인의 전시작가 선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 한국미술 소개작가 선정
주요 개인전
런기스 고기공장 영상 프로젝트, 반 호에크 갤러리, 파스칼 갤러리, 벵센느 숲 프로젝트,
토탈 미술관, 성곡 미술관, 일현 미술관, 중랑천 영상 프로젝트(의정부 능골교)
주요 그룹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및 세계수영선수권대회 특별전,,2018 PAF 파리(바스티유,파리) 아트 프로젝트 울산, 금강 자연 미술 비엔날레 큐브전(공주), 빛과 파라다이스전 프로젝트 (양평 미술관), 자하문 문화예술축제(서울), 장흥 물축제 설치 프로젝트(장흥),청주 공예 비엔날레 기업 미디어 지원(청주), 강정 대구 현대 미술제(대구), 유럽 국제 미디어 아트전(브룩셀), 프랑스 포리 국제 야외 설치 초대전(생 저멘 엉 레. 프랑스), 김환기 국제 미술제 (신안,목포), 아트 인 슈퍼스타전(서울) ,
유벅작가는 천재이며 세계적인
작가이다. 이런분의 작품을 볼 수있다는 것은 한국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에게서 한국의 불편함을 바라다 본다. 이런작가의 작품을 이제서야 본다는것은. 한국예술이 돈으로 인맥으로
아직도 엮어져서 흐른다는것이 관객의 눈을 불편하게 외골수로 예술을 느끼게하여. 심히 걱정스러운 맘이다.
한국예술의 불편함과 유벅작가 작품의 불편함이 묘한 대칭을 이룬다.
아니 앞으로의 유벅작가의 힘을 보게된다. 그는 천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