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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갤러리 내일 (Gallery Naeil)

큐브 루시다

최종 수정일: 2020년 7월 3일


2020년 7월 3일 부터 7월 9일까지 갤러리 내일에서 <큐브 루시다> 전시가 열립니다.



<참여 작가>


김종열, 서길헌, 서용인, 서홍석, 유 벅, 이정아,

이정원, 전성규, 전항섭, 조창환, 지원진, 황세준


<전시 소개글>


큐브 루시다, 또는 정적 속의 시선-展

큐브 루시다는 밝은 상자로서 그림들이 걸려있는 환한 공간을 가리킵니다. 화이트 큐브가 전시되는 작품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으로 준비된 백색 공간을 의미한다면, 큐브 루시다는 작품에 주목하는 시선으로서의 밝은 공간을 암시합니다. 그곳에는 정적 속에 작품을 향해 주목하는 밀도 있는 시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서길헌 작가는 그동안 다양한 작가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부족하지만 거기에 대해 비평문을 써왔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날 수 있었던 여러 작가와 한자리에 다시 모여 함께 전시를 열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다시 한번 시선을 나누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기획: 조형예술학박사 서길헌

후원: 갤러리 내일 관장 박수현

전성규(작가, 국립 목포대학 미술학과 교수)


<작품 이미지와 글>


김종열

김종열, 오래된 기억, 45x61cm, 종이 위에 혼합 재료, 2018


서길헌

서길헌 Visage-Machine, 53×45cm, Arcylic on canvas, 2019



서용인

서용인, 감각물질, 캔버스에 유채, 150x150cm, 2017



서홍석

마음 속 풍경_50x70cm_Fabriano Pittura Paper 위에 혼합재료 _2019


유 벅

유벅 작가님, 장미, 50x65cm, c-print위에 벌레, 2005



이정아

이정아, Shape, 116x78cm, Scratch & verdigris on nickel plate, 2019



이정원

이정원, 섬1, 116.7×80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전성규

전성규, Hidden Passage20, Dancing10, 116.8x91cm, Acrylic on Canvas, 2020



전항섭

전항섭, 산을 품은 물고기, 100×122×4cm, 삼목판에 잉크, 자작나무, 동판, 오일, 2018



조창환

조창환, 제한적 자유, 60x60cm, 오브제, 2020



지원진

지원진, 침묵의 소리, 씨앗 시리즈, 48x64cm, 2020



황세준

황세준, 내려놓음, 116.8x91cm, Acrylic on canvas, 2018




<전시 전경>













<평론글>


껍데기, 또는 이미지의 이중성

-유벅의 세계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때로 우리의 눈을 미혹하는 이미지들은 알고 보면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환영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겉모습만을 보려 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물들의 껍데기이다. 세워진 것, 서 있는 것들을 안쪽에서 떠받치고 있거나, 이른바 ‘빅 픽처(Big Picture)’, 즉 큰 그림을 구성하는 작디작은 망점(point)들은 때로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살이를 비롯하여 사람의 눈에는 순간을 살다가 덧없이 사라지거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각종의 해충들도 이 세상에 나온 나름의 이치가 있을 것이다. 짧고 사소하다거나 해롭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모든 것의 중심을 자처한다. 문명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져간 작은 존재들의 영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불빛을 보고 날아든 벌레들이 찐득한 유인액에 들러붙어 성상의 그림자를 빚어낸다. 덧없이 스러져가는 날벌레들의 사멸이 구원을 약속하는 구세주의 이미지로 부활한다. 미물들의 사체가 만드는 구원의 아이콘에는 죽음에의 유혹이라는 폭력성이 감춰져 있다. 이미지에 담긴 의미는 작은 해충들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이 작품에서 이루는 구원자의 이미지는 작가가 종이에 끈끈이 액을 발라놓을 때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작가의 의지이다. 작가의 의지와 벌레의 본능이 만나는 곳에서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난다. 작은 주검들이 이루는 구원자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미지가 함유한 의미와는 이율배반적이다. 유벅 작가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세계를 뒤덮고 있는 껍데기로서의 이미지의 이중성을 함축한다.

향광성(向光性) 벌레들은 불빛을 보고 창에 날아들다가 허공에 쳐진 망사창의 덫에 걸려 그대로 풍경(landscape)이 된다. 날벌레들은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본능에 따라 희생된다. 벌레들을 유혹한 빛은 그들의 주검으로 그들이 들어오려고 했던 빛의 문을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투영하는 풍경으로 바꾼다. 빛나는 빛은 생명체들이었던 벌레들에게는 죽음의 덫이다. 이미지라는 말의 어원인 ‘이마고(Imago)’는 고대에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서 장례식에서 영정처럼 쓰던 것이었다. 그것은 죽은 자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죽은 자의 형상이었다. 이처럼 이미지는 대리물이자 매개체였다. 유벅의 작업에서 벌레들의 사체는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이미지 자체가 됨으로써 죽음이 곧 사멸의 기호가 된다. 빛은 생명을 약속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벌레들에게 빛은 죽음의 덫이다. 이 작은 존재들은 빛을 보고 달려들었다가 이미지의 덫에 걸려들었다. 이들에게 빛은 삶의 길이자 곧 죽음의 길이다. 삶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리하여 빛은 이미지의 덫이 된다. 이들이 만든 이미지가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의 모습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또한 작가에게는 이미지의 모순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장치로 쓰이고 있다.

이미지는 곧 죽음이다. 그럼으로써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은 원본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성의 특징으로 지적한 이미지가 곧 원본이 되는 지점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자체적인 위상을 가진다. 그것은 유벅의 작업에서 죽은 벌레들이 다른 추상적인 죽음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죽음을 지시하는 기호이자 이미지라는 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동시에 또 다른 죽음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각형 창틀 안에서의 풍경의 죽음을 지시하기도 한다. 자신과 동시적인 죽음이 풍경으로서의 ‘빅 픽처‘ 안에서 발생한다. 풍경이 죽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눈에 맞게 재단된 경치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잘려 나온 그것은 죽어서 인간의 미의식 속에서만 산다. 작가 유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러한 잠재적인 폭력성, 또는 허위의식으로서의 미의식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죽어가는 나비들을 작품에 이용하여 생명윤리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작가 유벅 역시 똑같은 딜레마에 봉착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이러한 이율배반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인간이 아름다움이라는 핑계로 은폐하고 있는 폭력성과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사로 대표되는 미술사는 평면에 감쪽같은 시각적 껍데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눈속임의 역사이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어쨌든 물감의 덩어리일 뿐이다. 어떤 물감은 특별한 종의 곤충 껍질을 짓이겨 만들기도 한다. 애초부터 미의식의 진화를 다루는 미술사는 완벽에 가까운 시각적 껍데기에 도달하기 위한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스스로 먹는 쪽이 되거나 최소한 먹히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위협적인 껍데기로 무장한다. 사회적으로 문신(Tatoo)은 어느 정도 타부인 까닭에 자기 몸에 그것을 시술받는 사람들은 대개 평소에는 옷으로 가려지는 몸의 한정된 부위를 택한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내는 타투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적이다. 그러나 옷으로 감추어지는 부위에는 은밀하고도 반항적이거나 자기 과시적인 그림을 과감하게 새겨넣음으로써 자신을 또 다른 알터 에고(alter ego)로 위장한다. 그렇게 옷 속에 숨겨지는 몸통의 배후에 작가 유벅은 유인액으로 불러들인 작은 벌레들을 다닥다닥 붙여서 일종의 허위의 껍질을 만든다. 그것을 완성하는 그림들이 비록 해충들이지만 작은 생명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행위가 가진 이중의 폭력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종이는 연약한 물질이지만 그것은 작은 삼각형의 역학으로 이루어진 종합적인 구조를 통하여 바빌론처럼 번성하고도 타락한 도시 문명의 겉모습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얇게 썬 골판지 조각들이 무수하게 쌓여서 수직과 수평, 또는 아치의 구조를 이루며 세상의 뼈대를 구성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집합이 만드는 전체의 껍데기에만 시선을 던진다. 그 속의 제 자리에서 각각 전체를 떠받치는 작은 구조들은 죽은 듯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 유벅은 근래에 벌레 작업 계열의 연장선에서 이러한 약하면서도 강한 물질인 종이를 이용하여 지질학적인 층상구조나 거대한 문명의 껍데기를 떠받치는 역학적 구조의 속을 보여준다.

껍데기와 속은 어떻게 다른가. 속을 모를 때 겉모습으로서의 껍데기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것이 벌레의 사체나 유약한 종이들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뒤에도 껍데기가 이루는 이미지인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난 뒤의 풍경은 시각적 환영을 넘어서 다른 것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이 타자의 희생을 딛고 있고, 강성한 문명이 연약한 물질들의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될 때, 이미지의 의미는 시각적 장막 너머에, 시각적 껍데기의 안쪽에 있다. 작가 유벅은 이러한 이미지의 이중성을 캐내기 위하여 보는 이의 불편한 시선을 과감하게 돌파한다. 보기에 불편하다는 것, 그것은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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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빛의 시간

-이정아의 회화세계

글: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니켈, 황동, 백동 등의 얇은 금속 플레이트 평판은 우선 깨끗한 평면의 세계를 예비하고 있다. 작가는 그 매끄러운 표면을 샌딩작업으로 거칠게 마감하여 아크릴의 안료들을 받아들이는 미세한 주름들을 마련한다. 그렇기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평평한 면이다. 그 위에 여러 색소들이 단단하게 점착된다. 금속 플레이트 자체의 깔끔한 평면이 갖는 완벽한 매끄러움 때문에 그 위에 덧칠해지는 안료들이 발하는 효과는 코팅된 사진과 같은 평면의 매체가 내뿜는 듯한 비물질적인 광택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금속판은 그 자체로는 완벽하게 2차원적 평면을 구현하지만 거울과 같은 3차원의 잠재적 투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부분적으로 그라인더나 샌딩머신 등으로 미세하게 긁어낸 금속판의 표면에서 떠오르는 빛의 홀로그램 효과는 화면을 문득 4차원의 공간으로 비약시킨다. 캔버스천의 이미지들이 그 자체의 공간 내부로만 축소될 뿐임에 반하여 그녀의 금속판 위의 그림은 베이스로 사용된 재료의 이질적인 마티에르가 쏘아내는 다성적(polyphony) 효과에 의해 그림 밖의 잠재적 공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효과는 그림을 지상에 존재하는 풍경을 뛰어넘어 곧바로 우주나 심연 또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풍경과도 접속시킨다.

이정아의 그림을 이루는 기저는 기본적으로 세 개의 층위로 되어 있다. 우선 평면의 금속판 재료가 지탱하는 실재적인 층위와 그 위에 얹히는 두 번째 안료의 층위, 그리고 안료에 뒤덮여 매몰된 바닥을 뚫고 솟아나는 질료의 숨겨진 속성이 빛을 말하는 잠재적 층위이다. 각각의 층위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으면서 서로 함께 맞물려 총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특히 완성된 풍경을 떠도는 빛은 혼돈을 찢어내고 그 틈으로 열리는 새로운 차원의 출구이다. 그것은 "사건"으로서 세계 안에 던져지는 감각의 문이다. 사건은 직선적인 시간에 극적인 위상을 부여하는 시간의 강세부호이다. 몽환적인 풍경 위에 그라인더의 날이 번개처럼 할퀴고 지나가며 흔적을 남긴 표면을 통해 금속판은 자신의 물성을 아주 잠깐 드러내어 보인다. 대개의 작품에서처럼 금속판 자체는 캔버스천과 같이 바닥에 묻혀서 풍경을 떠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토대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이 철판은 이러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감으로 덮여있는 표면을 뚫고 잠시 노출된 금속판은 극히 일부로서 전체를 지배하리만치 충분하게 그 강한 물성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작가는 최소한의 자국만으로 그 빛의 효과가 전면에 이르도록 그 영역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때의 금속이 내는 빛은 직선으로 이행하는 시간의 지루한 몸통을 단칼에 잘라내는 시간의 예리한 단면과도 같다.

그녀의 그림에서 색면(色面)은 그대로 풍경의 기층이 되기도 하고 비어있는 공간적 여백이 되기도 한다. 서양화에서 공간은 오랫동안 형상의 구축을 위해 희생되어왔지만 추상표현주의와 색면추상에 이르러 그 회화를 구성하는 사각의 창으로부터 스스로 솟아나는 자발적 공간으로 진화하였다. 이에 더하여 이정아의 공간은 바닥을 이루는 금속판으로부터 나타나는 빛의 효과를 과감하게 차용함으로써 화면의 바닥과 표면을 하나의 평면에 아우르고 확장한다. 이로써 그녀의 회화에서 공간은 물질성이 비물질성으로 이행하는 자리가 된다. 그것은 새로이 생성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색면은 아크릴 스프레이 작업과 다양한 마티에르의 흔적을 드러내는 오브제의 사용에 의해 중첩된 공간으로 변이되어 준비되고 여기에 부분적으로 금속판에서 떠오른 반사효과가 더해져 블랙홀과 같은 비물질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효과들은 마치 히말라야 연봉이나 노호하는 심해의 장엄한 파도를 연상시키는 작품 등의 구상적인 요소에 적절하게 부가되어 그녀의 작업을 또 다른 세계로 끌어올려 보이지 않는 차원과 연접시킨다.

작가 이정아는 그리고자 하는 풍경을 몽상으로 꿈꾸는 시간을 대신하여 방호복과 방독면으로 무장하고 그라인더와 샌딩머신 등의 장비를 갖추고 금속평판과 대면하여 보석을 채굴하듯이 거칠지만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을 수행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빛나는 결과물들을 얻어낸다. 그렇게 얻어진 풍경들은 일상 속에서 오랫동안 작가의 의식을 떠돌다 일거에 금속판의 표면 위에 정착되어 구체화된 이미지들이다. 그 짧은 작업시간은 그러므로 그녀가 겪어온 모든 시간들의 층위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함축적인 시간이다. 그를 위해 작가는 자신이 포착하고자 맴돌던 의지 속에 움터온 여러 층위의 이미지들을 일순간에 재배열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세계의 혼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돈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비정형인 상태로 작가의 의식을 떠돌던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색과 형의 모습을 갖추고 외부로 나타난다. "나타남"은 어딘가에 있던 무엇인가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이미 예비하였던 부분과 나타남으로써 보이는 결과 사이에 그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자리한다. 이 사건은 작가의 포화된 의식을 끌어올리는 건곤일척의 작업으로서 작가는 보조 장비들을 총동원하는 집중적인 작업을 통해 이 순간을 한꺼번에 의식의 화면위로 낚아 올린다. 따라서 작가로서 그녀의 작업은 일견 거친 행위를 동반하지만 그것은 충만하고 엄중한 일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작가에게 소환되는 새로운 풍경들에는 멀리 꿈속에서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과 영혼을 순식간에 빨아들일 것만 같은 이상한 늪지대에 혼령처럼 서있는 나무들 위로 내리치는 번개와 천둥, 그리고 문득 번쩍이는 빛의 다발들이 있다. 빛들은 색채의 풍경으로 가득 채워진 세계를 비집고 여기저기서 새어 나와 광채를 발한다. 이는 혼돈의 세계에서 문득 솟아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빛이다. 이렇게 화면을 뚫고 새어 나오는 빛은 자체의 힘에 의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어둠이나 혼돈을 헤치고 밖으로 향하는 내적인 힘이다. 그 힘, 또는 빛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내면이자 동시에 질료가 간직하고 있는 숨겨지고 잊혀진 힘일 것이다. 그 빛을 준비하기 위해 작가는 우선 천지창조와도 같은 혼돈의 카오스를 그려낸다. 그것이 때로는 구체적인 풍경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이 세계의 혼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에서 그것은 생성적인 혼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혼돈의 시대, 혹은 혼란의 세계를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혼돈은 더 높은 시야에서 바라보는 창조적인 카오스이다. 이따금씩 그러한 혼돈을 뚫고 올라오는 빛, 또는 광휘(光輝, éclat)는 앙리 말디네(Henri Maldiney)의 표현처럼 응고된 빛이 아니라 방사(放射)하는 빛이다. 그러한 빛은 안으로부터 새어 나와 밖으로 점점 환하게 퍼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바로 작업을 통해 작가가 살고자 애쓰는 살아있는 빛의 시간이다.

인류를 편의보다는 끊임없는 속도경쟁으로 다그쳐서 고단하게만 했던 산업화 사회가 저물어가고 정보화 사회 또한 그 극점에 이르러 이제 인류는 5G 이동통신 문명의 문턱에 와 있지만 세계는 그만큼이나 부정적 혼돈상태인 엔트로피가 가속화되어 모든 것이 뒤섞이고 서로 간섭하여 점점 더 무채색의 비생성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비극적 속성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미 고전적인 이야기구조나 최소한 평면적 회화가 획득한 인공적 통일성의 한계를 까마득하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작가가 아날로그 장비로 무장하고 과감하게 캐어내는 추상이기도 하고 익명의 풍경이기도 한 혼돈의 정경은 오늘날의 세계가 감추고 있는 오만한 무질서에서 오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사용하는 동판이나 니켈의 평판이 숨기고 있는 금속의 차가운 물성으로부터 변용되어 나타나는 살아있는 빛의 시간은 내재된 물질의 실재적 힘을 가리고 있는 허영으로 가득한 가상의 현실에 틈을 내고 솟아오르는 신랄한 섬광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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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제한적 자유, 그리고 탈영토화

-조창환의 조형작업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한때 인류는 열심히 세계의 속살을 파헤치고 사물의 얼개를 해독하여 이를 바탕으로 문명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문명은 점점 분화하였다. 본다는 행위도 그만큼 세분화되었다. 한동안 미술은 절대주의나 미니멀리즘이라는 비좁은 영역으로 축소되고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퇴행하였다. 이후로 그것은 신표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해체주의의 회생경로를 거치면서 규율에서 풀려나 다시 잡다한 이야기로 재발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규범의 돌쩌귀에서 풀려난 미술은 이전의 아날로그적 자유를 망실하는 대신에 디지털적 규격이 허용하는 만능통로의 열쇠를 얻었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이진법으로 여과하여 접촉면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공통의 코드로 통일했다. 그것은 표준화된 호환성을 기반으로 세상에 유비쿼터스적 소통의 자유를 불러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기존의 사물을 잘게 부수어 최소 단위의 조각으로 규격화하고 다시 그것을 짜맞추어 새로운 대상으로 만드는 것으로 요약된다. 조창환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미학적 스토리라인의 한 축에 잇닿아 있다. 그는 개인의 ‘예술가 되기’라는 약한 고리를 벗어나 보다 본원적인 창조성의 행위를 찾는다. 그것은 세계의 구조를 인수분해하여 그것을 다시 짜맞추는 행위와 같다. 즉, 몇 가지 단순한 규격으로 세상을 짓는 원칙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창작행위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속적 프로세스에 끌려가는 대신에 몇 가지 제한된 조건들에 의해 창작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풀어놓는 것이다. 대개 작가가 모든 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통제하려 함으로써 자유를 잃을 때, 거꾸로 그는 이러한 제약의 고삐를 풀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창의적인 자유를 얻는다.

퍼즐 조각이나 레고 블록의 요체는 각각의 모듈이 동일한 규격의 요철이 있는 지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서로 어떠한 짝들과도 맞물릴 수 있다. 그것의 핵심은 표준화된 호환성이다. 그것은 파편화된 모듈에게 어느 형체라도 짜맞추어 낼 수 있는 가변성을 부여한다. 조창환은 이러한 모듈의 특성을 응용하여 기존의 형상을 허물고 그로부터 얻은 비교적 균일한 패턴의 잔해를 사용하여 다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기존의 대상과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 사이에 생겨나는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부지중에 미술작품에는 작가의 개성이 담겨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개성이란 자아에 뿌리를 내리고 확고한 자기결정권을 가진 자신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는 늘 불완전한 미궁 속에 있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아티스트 되기’라는 삶의 방식을 일종의 탈영토화에서 재영토화에 이르는 여정으로 이야기한다. 아티스트는 우선 자신을 벗어나서 새로운 미지의 땅으로 가야한다. 라깡(Jacques Lacan)의 거울단계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 역시 또다른 타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항상 타자와 만나게 된다. 타자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아는 자신만의 비좁은 땅을 벗어나 탈영토화 된다. 일찍이

자아라는 개념은 이성을 중심에 놓은 이기적 세상에 봉사하였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자아의 오만과 편견을 확대재생산하여 인류문명을 위험한 타자와의 대결구도로 이끌어갔다. 그리하여 무수한 극단적 대립을 낳고 전세계를 파국적 경쟁과 끊임없는 분쟁의 위기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반면에 조창환의 조형작업은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무화시키는 사유와 시각적 자유에 발을 디디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것을 서로 잘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어줄 때 자아의 아집을 벗어나 드넓은 화해의 바다에 이른다. 모든 것이 정해진 규격에 맞아떨어진다면 서로 다른 어떤 것과도 자유롭게 맞물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약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운 만남을 낳는다. 이른바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은 일견 모순이지만 이 모순어법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점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가는 기술혁명의 시대를 꿰어주는 유니코드와 같다. 우리는 이미 모든 유비쿼터스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대의 한복판에 와있다. 아날로그시대의 표준화공정은 기계 산업의 발달을 견인하였다. 또한 디지털시대에는 온갖 사물의 생태계가 0과 1로 규격화된 두 가지 모듈의 무한조합으로 탈바꿈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들이 다른 어떠한 것들과도 서로 맞물리는 사물인터넷 시대를 불러왔다. 조창환의 작업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크기가 다른 몇 가지 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패키지 박스는 어떤 사물이라도 용이하게 포장할 수 있다. 지난 작업에서 조창환은 먼저 그러한 포장 용도로 쓰이는 종이 박스를 잘라서 일종의 조각난 모듈을 만든 다음, 그것들을 어긋나게 이어 붙이고 쌓아 올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어떤 미지의 형상을 조합해냈다. 그러한 작업에서 구상하는 형태는 단지 작가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이고, 구체적인 것은 박스 조각들을 붙이고 쌓아가는 과정에서 모듈들이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작가의 창작 행위는 잘라낸 패키지 박스의 모듈이 가진 속성, 즉 색깔이나 모양이 촉발하는 우연성에 상당부분 좌우된다. 인간의 두상과 같은 안드로이드 형태를 갖추는 작품 계열은 작가의 구상단계에서의 막연한 상상적 스케치가 현실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창의성을 반영한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형상이 가진 표준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인간에게서 개성을 생략하면 공통적인 형상과 기능이 남는다. 원칙적으로 인간의 개성 또한 지놈(genome) 분석을 통해 모두 유형화될 수 있다. 그렇게 해체된 요소들을 모종의 알고리즘으로 재배열하면 새로운 문명을 낳을 안드로이드 회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해야 할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문명에서 계열적으로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파생시킨 공통적인 모듈인 지놈의 속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의 핵심은 기본적 형태나 구조로 모듈화된 패키지 박스가 필연적으로 만들어가는 미시적 차원과 그것이 결구해내는 전체적인 형상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우연적 결과에 있다. 물론 작가는 어렴풋이 어떤 그림을 구상하고 있지만, 그것은 패키지 박스 모듈의 조건에 따라 현실화되는 과정을 통해 미지의 형태로서 파생된다. 패키지 박스로 만든 모듈은 원래 지니고 있던 색깔이나 도안 등이 분절된 상태에서 어떤 전체의 부분을 만들어간다. 기존의

패키지 박스가 가진 원래의 용도와 규격은 와해되고, 본래 가지고 있던 또다른 요소인 평면성과 색깔, 맥락없이 잘린 디자인과 타이포그라피 등이 전혀 새로운 조형적 질서를 만들어간다. 모듈의 특성은 동일성이 만들어내는 통일성이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그것은 전체를 이뤄갈 때 동일성의 특성을 반영하지만 전체의 형태는 개개의 모듈과는 다른 것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퍼즐 조각이나 레고 블록처럼 조립되어 또다른 전체를 만들어가는 개별적 단위의 역할을 한다.

위의 작업에서 그것이 두상과 같은 구체적 형태를 따르지 않고 비정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가는 경우에는 모듈이 가진 동일한 구조에서 유발되는 연쇄적 프랙탈 구조를 빚어낸다. 프랙탈은 부분이 가진 속성이나 모양이 전체의 구조에 담기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의 모듈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인 다른 모듈과 결합하여 전체의 일부를 만들어 가지만 원래의 색깔이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형태는 그것이 불어남에 따라 차이를 더 키워 종국에는 전혀 다른 전체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나 조형의지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여 모듈이 거의 스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단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매우 놀이적이면서 고정된 자아의 영토를 벗어나는 탈영토화 과정이다. 여기에서 발현되는 전체적 형태는 동일한 형태가 비슷한 듯하면서도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비가역적 우연과 필연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체형태는 모듈의 가변성이 낳는 우연에 의한 창의적 생성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결국 기존의 패키지 박스가 가지고 있던 글자나 디자인의 색깔 등과 같은 요소가 가진 스토리들이 분절되어 나타나는 양상에 따라 새로운 스토리라인이 구성된다. 기존의 스토리가 와해되어 우연적인 스토리 요소로 환원되고 그것은 다시 모듈 자체의 특성을 머금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과 쉽사리 결합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산업적 환경의 부산물들이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에 따라 스스로 새로운 구조로 변이되어가는 양상으로 정리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지 보다는 기존의 분절된 개별적 스토리에 따라 무한히 변형될 수 있는 가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서로가 어딘가 겹쳐지듯 닮아 있지만 각각의 작업의 결과가 매번 다른 시각으로 나타난다. 즉,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의 다른 표현처럼 구현된다. 이는 동일성이 다른 강도와 리듬으로 반복되어 만들어내는 차이와 같다. 쟈크 모노(Jacques Monod)가 <우연과 필연>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계에서 우연이 만들어내는 것이 필연과 결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합목적, 즉 전체성이 세계 안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놀이의 핵심은 작가의 의지는 최소화하고, 자연 또는 인간 밖의 질서나 규칙이 조형행위를 만들어내는 자연발생적 자유에 있다.

작가 조창환의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몇 가지 정해진 규격을 따름으로써 자유의지가 제한받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서로 자유롭게 만날 가능성을 열어 놓은 규격적 자유가 창출해내는 무한변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어떤 형태를 고집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드러내어 무한변이를 낳는 조형적 자유를 축소하지 않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그가 2017년 5월 ‘갤러리 울’에서 김성호 작가와 ‘퍼즐 H’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발표한 <가든 No.9> 시리즈에서는 다른 작가와 작업의 몫을 일정부분 나눔으로써 작가 개인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한 정황이 뚜렷한데, 여기에서 이러한 작업의 미덕은 충분히 확증되었다.

미술은 놀이적 측면을 통해 교육적인 효과를 얻기도 한다. ‘가베’ 조각은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색깔과 형태를 가진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풍부하게 보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교육용 도구이다. 근래의 작업에서 조창환은 이러한 교육용 자료에서 얻은 색편이나 특정 기능을 가진 기존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여러가지 형태의 부품 같은 요소들을 찾아내어 준비한 개개의 오브제를 다양한 형태와 색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모듈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개의 영역으로 분리된 캔버스 프레임의 뒷면의 공간을 이용하여 배열해 나감으로써 부분적인 ‘프레임’에 나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양한 관계로 공존하는 전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작업의 결과는 점점 무한증식해가는 어떤 첨단 도시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포화상태의 도시문명 속에서 탐험하듯이 찾아낸 각종 플라스틱 오브제의 색깔 모듈들은 그 자체 안에 이미 그것들을 쏟아낸 도시의 얼개를 품고 있는 자신만의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가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오브제 파편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기존의 모체에서 떨어져 나온 사물들에게 새로운 환경과 영토를 찾아주는 동시에 그것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규격과 제한적 자유를 통해 저절로 조형 행위를 수행해내는 프로세스로서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가든 No.9> 작업에서 꽃봉오리 구조와 같은 잠재적 형태가 계속적으로 증식하여 공간을 채워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조형 요소 자체의 내적 질서에 의해 스스로 증식하여 세상을 채워 나간다. 그것은 어딘가 수분이 거의 없는 극한의 건조한 환경에서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돌돌 말린 채로 지내다가 아주 오랜만에 비가 오거나 하여 다시 수분을 만나면 생생한 식물로 되살아나는 부활초(復活草)의 생성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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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또는 침묵의 울림

-지원진의 묵흔에 대하여

서길헌(조형예술학 박사)

사람들은 손쉽게 겉모습을 쫓는다. 우리가 현혹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화려한 외양이다. 재화와 물질 우선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여 우리 주변은 어느덧 호사스런 장식들로 가득하다. 그림 또한 대체적으로 외피의 화려함이나 감각적 환영을 따라가기 급급하다. 우리의 눈은 세상의 온갖 이미지들이 방사하는 정보의 총량으로 넘쳐나 이제는 잠시라도 여백을 찾아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지마저 고갈되고 있다. 너무나 많은 정보의 총체는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을 피상적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각양각색의 품목이 철철 넘쳐나도 그것들은 그저 진열창 안에 놓여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이미지의 껍질로만 다가온다. 껍질 안에 내장된 빽빽한 콘텐츠는 손닿을 수 없는 추상적 욕망의 목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넘쳐나는 물질의 시대에 오히려 삶은 점점 더 간접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그 속살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 속에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투사하려 애쓴다. 이 시도의 성취여부는 늘 불확실하다. 정신적인 것은 눈에 드러나기 어렵고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면 그것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솔직하고 직접적인 행위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붓을 통해 화면에 투영되는 마음결은 손의 움직임을 타고 드러난다. 그것은 쉬이 식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리 쓸 수 있는 눈속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붓에서 나오는 자취들은 화면의 완고한 침묵 속에서 숨길 수 없는 그대로의 생김새와 그 헐벗은 전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 지원진은 오히려 그림을 침묵의 적막으로 채우는 여백을 통해 화면에 마음의 자리를 비워놓는다. 너른 화면에 붓으로 간결하고 묵직한 산발성의 묵흔만을 남김으로써 그는 모든 것이 포화상태인 세계에서 도리어 삶을 온전하게 하는 여백의 터전을 마련한다. 비어있는 화면의 침묵은 무위를 요하는 마음의 공백과 잇닿아있다.

이미 규정된 사전적 의미를 지시하는 글자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딱딱하게 멈춰있는 의미 안에 갇혀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그가 내면의 울림이 무르익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기다려 하나하나 긋는 행위를 통해 산포시키는 필획에는 잠재된 싹을 매 순간 최초로 틔워내는 찰나적 사건으로서의 유일한 힘이 있다. 그 힘은 서예에서처럼 약속에 따른 기호로서의 글자를 쓸 때에 필요한 획을 모두 따라 그어야만 원하는 뜻을 완성하는 재연(再演) 또는 재현(再現)적인 행위와는 전혀 다른 전격적이고 자발적인 움직임에서 나온다. 그가 긋는 한 획 한 획의 움직임은 이미 글자본에 정해져 있는 글자의 형태를 완료하는 것과 같은 순서가 정해진 행위가 아니라 미지의 의미를 향해가는 열린 몸짓이다. 이로써 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의 획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로 자라나는 어엿한 생장과정을 거쳐 당당한 완성에 이른다. 이처럼 그가 화면에 몇 가지 모양의 단순한 필획을 긋는 일은 그것들 낱낱의 독자적인 살과 뼈를 실시간으로 몸소 짓고 체득하는 행위가 된다.

역사적으로 서예와 공통의 필묵매체인 붓을 사용하는 수묵화에서 필법은 문자와 관련이 있었다. 문자는 일정한 의미를 갖는 매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직접 붓으로 쓰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정신성을 접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우리의 선조 문사들이 붓으로 대상의 외형만을 모방하는 잔재주를 자랑하기보다 시서화(詩書畵)를 정신 수양의 방편으로 삼아 사기(士氣)니 문자기(文字氣)니 하는 서예적 필치의 산수화나 사군자에 더 가치를 부여했던 것도 다 문자가 갖는 정신성을 체득하는 데에 의미를 두었던 까닭이다. 작가 지원진이 젊은 시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통의 본질을 담아 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목탄드로잉, 영상, 사진, 디지털이미지 등 여러 시도를 하였지만 결국 다채로운 외피만을 드러내는 매체와는 상관이 없는, 행위 자체를 통한 체험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귀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작업은 작가가 살아있는 획을 낳는 호흡을 통해 계속적으로 성찰하는 정신의 시적 잠재성으로 늘 생생하게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다.

글씨를 잘 쓰기 위한 필획의 매뉴얼로서의 운필법과는 관계없이 서예가나 화가가 찍고 긋는 수만 번의 점과 획은 시간적으로 오로지 한 번의 행위라는 유일성을 갖는다. 붓으로 한 획을 긋기 위해서는 점을 찍는 '짓'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의 획은 한 일자(一)처럼 하나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하나의 획이 갖는 하나의 의미는 오직 한 번뿐인 획을 긋는 체험의 절대성을 통해 하나뿐인 획의 독자성과 완결성을 얻는다. 붓으로 찍은 점은 매번 다양한 모양과 면적으로 나타나고 그때마다 다른 강도의 진폭을 가진다. 그래서 붓으로 그은 일점(一點)은 일점이면서도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인 점과 다른 자기 몫의 성깔을 지니고 태어나는 독립적인 점이 된다. 여기에 작가가 찍고 긋는 각각의 점과 획이 갖는 유일성이 있다. 그것은 활자본처럼 미리 정해진 불활성의 것과는 다르게 모든 획이 언제라도 스스로 눈을 뜨고 풀이나 꽃줄기로 자라날 수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나 싹과 같은 생기(生氣)를 함축한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통틀어 점 하나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식의 사유를 하는 현인은 적지 않았다. 오늘날 현대물리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도 그와 같은 개념을 마주치는 일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물질로 가득 넘쳐나는 오늘날 작가 지원진이 찍거나 그어내는 짤막한 점이나 획 속에 깃들어 있는 침묵의 세계는 전혀 새로운 성찰의 뉘앙스를 갖는다. 그의 절제되고 압축된 묵흔의 공간에 들어있는 질적 세계는 점점 가벼워지고 얇아지고 짧아지고 작아지는, 요컨대 경박단소(輕薄短小)한 디지털 기억매체가 압축하여 저장할 수 있는 양적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적 울림을 갖기 때문이다.

그가 간결하게 찍은 점이나 선은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여백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 필획들은 전체의 면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비어있는 공간을 더욱 폭넓은 공백으로 만든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미지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미 무엇이 되어버린 협소한 자로서 늘 마주하는 비극을 잊게 만든다. 그 공백의 자리에는 아직 우리에게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드넓은 침묵의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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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기, 혹은 경계 없는 경계

-황세준의 회화

소개글: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산포된 각각의 중심들로부터 퍼져나가는 동시다발적인 무채색의 선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연못 같은 곳에 비가 내릴 때 생겨나는 수많은 동심원에서 유발되는 듯한 선들은 서로 다른 동심원에서 파생되는 선들과 서로 만나 각자의 파장끼리 부딪치고 화해하며 자연스러운 경계를 이룬다. 파상적으로 불어나는 각각의 선들이 함유하는 고유의 힘과 시차에 의해 각각의 동심원들 사이에 생성되는 경계 없는 경계들은 도처의 여백들을 담담한 균형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평면을 전면적으로 채우고 있는 수많은 회색조의 꼬물꼬물한 선들은 화면을 살아 숨쉬는 주름진 영토로 만든다. 단색조의 통일된 색조에 의해 전체의 화면은 침묵의 일체성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작가 황세준은 호흡을 가다듬고 거의 수행에 가까운 행위로 화면 위에 단순한 색조만을 사용하여 자신 고유의 일정한 무늬를 그려나간다. 그 무늬는 지문 같기도 하고 디지털 기판의 회로도 같기도 하다. 이 모든 무늬들은 그의 몸이 실존적으로 토로해내는 내면의 지형도이자 세계와 대면하는 실시간의 순수한 기록이다. 마치 거미가 자신의 몸에서 끊임없이 줄을 자아내어 거미줄을 치듯이 그의 그리는 행위는 현재시제의 흔적을 나타낸다. 이러한 작업은 일견 흘러가는 시간의 궤적을 한 단위씩 더해지는 디지털적인 숫자의 연속으로 기록하는 로만 오팔카의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자신의 삶의 직접적인 궤적을 연속적인 실시간의 아날로그 선으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황세준의 작업은 오팔카의 숫자를 통해 걸러지는 간접적인 작업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말하자면 디지로그(Digital+Analogue)적인 회화이다. 디지로그는 현대의 모든 문명을 흡수하는 디지털의 차갑고 이성적인 방법론과 따뜻한 감성의 전통적인 수공업적 세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를테면 그는 손을 써서 행하는 자연스러운 원운동의 붓질을 통해 전체적으로 평등한 색조를 띤 균등한 굴곡의 선들을 파생시키고 그로부터 일정하고 규칙적인 무늬를 뽑아내어 화면을 전체적으로 고르게 채워 넣는다. 그러한 행위와 결과가 담고 있는 세계는 디지털에서의 이진법적 반복이 무한의 세계를 조합하듯이, 작가 자신만의 풍부한 의미의 조합을 내장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선 긋기의 회화행위를 우주의 운동과도 상응하는 원운동의 행위를 통해 아주 느리게 고요와 침묵 속에 주술을 행하듯이 수행함으로써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 자유와 평화에 이르고 그로부터 화해와 상생의 의미를 아우르며 자아의 치유에 도달한다. 원운동의 동작에는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이 발휘되어 외부로 분산되었던 여러 요소의 힘들이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오는 물리적인 환원의 의미가 내재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미로를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이 미로를 통과하여 어떤 목적지에 다다름으로써 종교적인 순례를 완성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미로를 설계함으로써 순례의 신비와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대신한다. 미로는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름 속에는 꼬불꼬불하게 응축되어 대대손손 전달되어지는 유전자적인 정보가 빽빽한 밀도로 들어차있는 것처럼 그가 자아내는 소용돌이 지문과도 같은 선들 속에는 예술가의 실존의 비밀이 시시각각으로 함축되어있다. 그가 지어가는 미로는 지움과 비움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이 생성되는 치유의 흔적이기도 하다. 화면의 전면에는 겉으로 노출되어 있는 선들에 의해 지워지고 덮여진 지난 시간의 상처와도 같은 선들의 자취가 여기저기에 가끔 보일 듯 말 듯 드러남으로써 과거시제와 현재시제, 채움과 비움, 있음과 없음, 소멸과 생성이 서로 조응하고 공존하는 일체성과 전체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한때 황세준은 다양한 색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삶의 고통과 번민으로 화면들을 한껏 가득 채웠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는 다채로운 외피로 이루어진 세계를 덮어버리고 무채색을 사용하여 거의 미니멀에 가까운 단색조의 세계로 시각을 전환했다. 단순한 무채색 속에 그는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세계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작가는 이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와 같이 고통과 번민을 지나서 만나는 아침처럼 번잡하고 힘든 시간을 겪고 나서 찾게 된 평화이자 궁극적으로 되찾고자 하는 본연의 자아라고 말한다. 내면의 자유와 평화는 자신에게로 돌아와 만나는 환원적인 세계이자 자기 안에 있는 보다 넓은 의미의 범아(凡我), 즉 대우주의 세계이다. 한국의 전통색인 다섯 가지 오방색을 섞으면 무채색이 되듯이 부분은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을 포괄한다. 멸(滅)이면서 생(生)이고 생이면서 동시에 소멸이다. 작은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 안에 들어와 있는 동시성은 우주의 전체성의 원리와도 상통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함축의 세계, 있음(有)보다는 없음(無)의 의미가 강조된다. 없음은 여백의 미학으로 확장된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여백은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와 맞닿아있다. 그러한 세계는 최소의 것으로 최대의 것을 포괄한다는 미니멀리즘의 시각에서 한국적인 미니멀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색채로서의 회색은 블랙과 화이트라는 양극의 중간지대이기도 한 폭넓은 합일의 세계로서 포용과 관용의 세계와 통한다. 이렇게 그의 단색조 작업에는 대립적인 요소들이 서로 상생하는 경계 없는 경계의 세계가 자리한다. 이러한 사유의 세계는 이 시대가 진정으로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자기 성찰을 동반한다. 즉 작가로서 그가 택하여 가는 길은 구별 짓고 수 많은 경계를 그어 갈등을 증폭시키기 보다 개인의 번뇌를 모두 내려놓고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은 채 깊은 울림을 가진 성찰과 사유의 창작행위를 통해 상생과 어울림의 보다 넓고 큰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한 합일의 의지를 묵묵히 펼쳐나가는 예술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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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길>




Tel. 02.0 2287. 2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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